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국-이스라엘 관계 (문단 편집) === 표면상의 배경: 아랍의 반미 정책에 대한 미국-이스라엘의 공조 === 한마디로 아랍 세계에서 발생한 [[반미]](反美)에 대항해서 미국-이스라엘의 공조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1967년부터 1991년까지 [[미국]]과 [[이스라엘]]을 묶어주었던 이해 관계는 분명하고도 실질적이었다. 따라서 1991년 소련의 해체 이래로 양국 관계의 기초가 상당히 불확실해졌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도 그만큼 중요하다. 1948년 미국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승인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조지 마셜]] 국무장관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두 나라는 어떤 측면에서도 '''결코 동맹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비록 미국이 언제나 이스라엘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했지만 미국의 정책이 실제로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 1948년에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소련]]의 팽창을 억제하는 것이었으며, 주로 [[터키]]와 [[그리스]]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리스에서는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또한 그리스와 터키 모두 외부적으로 소련에게 위협을 받고 있었다. 미국이 볼 때 이 지역의 요충지는 터키였다. 소련의 [[흑해]] 함대가 [[지중해]]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봉쇄하는 방법은 [[이스탄불]]의 좁은 해협, 즉 보스포루스 해협 뿐이었다. 만약 소련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얻게된다면, 소련은 미국의 힘에 도전하며 남유럽까지 위협할 수 있게 된다. 중동에서의 미국의 봉쇄 전략에 대한 주요 장애물은 영국과 프랑스가 2차 세계 대전 이전에 이 지역에서 누렸던 영향력을 재구축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아랍 세계와 좀 더 긴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유럽의 책략에 대한 아랍 세계의 적대감을 이용하고자 했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그리고 이집트의 [[나세르]]가 정권을 잡고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1956년에 사태가 악화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통제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는 알제리에서 반(反) 식민주의 저항을 진압하기 위해 전투 중이었고, [[레바논]]과 [[시리아]]에서는 자신의 영향력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스라엘도 이집트가 수에즈 운하를 통제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1956년 이들 세 나라는 이스라엘의 이집트 침공을 위한 음모를 꾸몄다. 일단 이스라엘 군대가 운하에 도달하면,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개입하여 이스라엘의 침입 및 이집트와의 잠재적인 충돌로부터 운하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그곳을 장악한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술을 거나하게 마신 뒤 냅킨에 그렸을 때나 그럴듯해 보이는 발상이었다. 미국이 볼 때 그 모험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를 소련 진영으로 떠밀어 그들이 강력한 전략 동맹을 맺게 할 수 있었다. 소련의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그 어떤 것도 허용할 수 없었던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결국 수에즈 음모를 중단시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를 철수시키고 이스라엘을 1948년 당시의 전선으로 후퇴시켰다. '''이처럼 1950년대 말 까지만 해도 미국과 이스라엘은 그다지 특별한 관계가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전략적 문제는 자국의 산업적, 군사적 기반으로는 국가 안보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소련은 말할 것도 없고 이집트와 시리아, 그리고 잠재적으로는 요르단 같은 국가들의 위협에 직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자국을 방어하는 데 필요한 무기를 생산할 수 없었다. '''지속적으로 무기 공급을 받기 위해''' 이스라엘은 강력한 후원국이 필요했다. 이스라엘의 첫번째 후원국은 [[소련]]이었다. 소련은 이스라엘이 영국에 반대하며, 나아가 자신들과 동맹을 맺을 수도 있는 국가라고 보았다. 소련은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이스라엘에 무기를 공급했지만 이 관계는 곧 무너졌다. 이어서 [[알제리]]에서 여전히 전투를 수행하고 있던 [[프랑스]]가 소련을 대신해 이스라엘의 원조국으로 나섰다. 아랍 국가들이 알제리 반군을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관심사는 반대편에 서 있는 이스라엘을 강력한 우방으로 확보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프랑스는 이스라엘에 항공기와 전차, 그리고 핵무기 개발에 필요한 기초 기술을 제공했다. 이 때까지도 미국은 중동 지역에 대한 폭넓은 전략 목표에서 이스라엘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간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수에즈 운하 문제가 발생한 뒤 자신의 전략적 관계들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이집트를 대신해 수에즈 문제에 개입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랍 사회주의]]''' 노선을 내걸고 있던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은 친소 노선을 취했다. 특히 나세르 정권이 오랫동안 중동을 좌지우지하던 영국과 프랑스의 군사적 압력을 견뎌내고 [[수에즈 운하]] 국유화에 성공하자, 아랍민족주의, 아랍사회주의를 내건 나세르 노선이 아랍인들 사이에서 엄청난 열풍을 불러왔다. 프랑스와 영국이 남겨둔 [[시리아]]와 [[이라크]]의 정권들은 정통성이 취약했으며, 대중과 지식인들은 군사력에 의한 '''[[아랍민족주의]]'''를 추구하는 나세르 독트린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시리아]]는 이미 1956년부터 소련 진영으로 넘어가기 시작했고, 1958년에는 이집트와 [[아랍 연합 공화국]]이라는 국가연합을 형성하였다. 1963년에 나세르 노선을 추종하는 [[바트당]]의 쿠데타가 일어난 뒤로는 그와 같은 노선이 더욱 강화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이라크]]에서도 역시 바트당의 쿠데타가 발생했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아랍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점점 더 회의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식량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아랍 세계는 단호하게 반미(反美)로 돌아섰다.''' 반천년(半千年) 내내 외세의 지배로 지샌 아랍인들은 미국을 영국과 프랑스를 대신하여 등장한 새로운 외세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소련은 미국과는 달리 여러가지 프로젝트에 자금을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아랍 사회주의자들은 소련이라는 모델을 매력적인 것으로 보았다. 미국은 한동안 거리를 유지하면서 프랑스가 이스라엘과 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수준에서만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중동의 반(反) 소련 정권들에게 방공 무기 체계를 공급하기 시작했을 때, 이스라엘도 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67년에 [[샤를 드골]]은 알제리 전쟁을 종결하고 프랑스와 아랍 세계의 관계를 회복하는 방안을 추구했다. 그는 이스라엘이 주변국들을 공격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그의 요구를 무시하고 [[6일 전쟁]]을 개시하자 프랑스도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지원을 중단했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이웃 아랍 국가들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자 미국에서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이라는 수렁에 빠진 채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여서 이스라엘이 미국인들에게 다시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신속하고 결정적인 승리의 모델을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스라엘은 그런 정서를 활용하여 미국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베트남 전쟁]]과 날로 악화되는 여론에 시달리던 [[린든 존슨]] 대통령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승리에 대한 미국 대중들의 열광이 두 가지 측면에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첫째, 어떤 전쟁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세대는 베트남 전쟁에 대한 지지를 강화시켜줄 것이다. 둘째, 이스라엘의 승리는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시켰고, 이는 이스라엘을 미국의 유용한 동맹국으로 만들고 있다. 미국-이스라엘의 관계를 위한 전략적 기초가 출현한 것이다. 소련은 1960년대 중반에 시리아와 이라크에 진출했으며, 이미 양국(兩國)의 군대를 양성하고 있었다. 미국의 동맹국들이 소련을 포위하자 이에 대응하는 소련의 전략은 그들의 배후에 있는 나라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인 뒤 그들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압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미국의 전략적 사고에서 언제나 중심에 서있던 [[터키]]는 소련에게도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1967년 이전에 일어난 시리아와 이라크의 쿠데타는 미국의 전략적 문제를 심화시켰다. 터키는 북쪽으로는 강력한 소련과 남쪽으로는 소련에 의지하는 두 국가들 사이에 끼어있는 상태가 되었다. 소련이 이라크와 시리아에 군대를 배치했다면 터키는 곤경에 처했을 것이며, 동시에 소련을 봉쇄하기 위한 미국의 전반적인 전략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렇게 이스라엘은 미국이 발판으로 삼을 수 있는 전략적 자산이 되었다. 미국은 이라크의 군사력을 억제하기 위해 팔레비 왕조가 통치하고 있던 친미 국가 이란을 무장시켰다. 게다가 이란은 소련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도 중요했다. 이스라엘은 소련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는 않았지만, 시리아와 접해있다. 친미 성향의 이스라엘은 시리아를 억제하는 한편, 시리아에 대한 소련의 군사적 전개를 더욱 복잡하고 위험하게 했다. 또한 이스라엘은 이집트와도 대립하고 있었다. 소련은 이집트군을 무장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해군 기지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이는 지중해에 있는 미군 6함대에 대한 위협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일단 이집트와 시리아가 소련 쪽으로 돌아서자 이스라엘을 무장시키는 것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억제함과 동시에 이들 국가에서 소련이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만드는 '''저비용 해법'''으로 등장했다. 이것은 미국이 [[지중해]]를 장악하고 터키가 받는 압박을 완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바로 이 시점부터 전략적인 이유로 미국은 이스라엘에 많은 지원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전략은 효과를 발휘했다. 나세르의 사망 이후 권력을 승계한 이집트의 [[사다트]] 정권은 시리아와 함께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에서 한때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하지만 소련의 군수지원은 대단히 미흡했고, 결국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은 이스라엘군의 반격으로 다시 후퇴해야 했다. 전쟁이 사실상 무승부로 종결된 뒤에 어정쩡한 소련의 태도로 절호의 기회를 날린 것에 실망한 사다트 정권은 전격적으로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친미 노선으로 돌아섰다. 그리고 1978년에는 미국의 카터 대통령의 중재하에 이스라엘과의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사다트는 이 때문에 아랍권내에서 배신자로 규정되었고, 결국 이슬람 근본주의자한테 암살당했다. 하지만 권력을 승계한 [[무바라크]]도 친미노선을 계속 유지하면서,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강경하게 탄압했다.] 비록 시리아가 친소(親蘇) 진영으로 남아있기는 했지만, 이집트가 소련과의 관계를 단절한 것만으로도 지중해에서의 소련의 위협은 둔화되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또 다른 위협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팔레스타인]]의 [[테러리즘]]이었다. [[PLO]]는 나세르에 의해 [[아라비아]] 반도의 군주국들과의 투쟁을 확장하기 위한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각국의 왕족들을 쓰러뜨리고 그 국가들을 자신의 통일 아랍 공화국으로 통합시키고자 했다. 아라비아 반도의 불안정을 가중시켜 미국을 약화시키길 원했던 소련 정보 당국자들이 PLO 요원을 훈련시키고 실전에 투입시켰다. 1970년 9월 PLO의 [[야세르 아라파트]]가 미국의 핵심 동맹국이자 이스라엘의 비밀 동맹국인 [[요르단]]의 지배 세력인 [[하심 가문]]에 대한 봉기를 시도하자 상황은 위기로 치달았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시리아는 기갑 부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켜 요르단에 진입했다. 이것은 분명 요르단의 혼란을 이용해 요르단에 대한 시리아의 권리를 주장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러자 이스라엘 공군이 개입하여 시리아를 저지했고, 미국은 파키스탄 병력을 공수해 요르단을 지원했다. 이 전투에서 약 1000명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이 사망했고, 아라파트는 결국 [[레바논]]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이 분쟁은 [[검은 9월단]]으로 알려진 테러 집단의 기원이 되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이스라엘 선수단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다. 검은 9월단은 아라파트의 [[파타]](Fatah)에 속한 비밀 무장 단체였지만, 유럽에서 소련의 이익을 위해 활동함으로써 특별히 더 중요해졌다. 1970년대 동안 소련은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 등 여러 국가에서 극좌 테러리스트 집단[* 서독의 [[바더 마인호프]], 이탈리아의 [[붉은 여단]] 등이 대표적이다. 그외에 보통 자칼로 알려진 전설적인 테러리스트 [[카를로스(테러리스트)|카를로스]]도 [[KGB]]의 보호를 받았다.]을 지원하고, 아일랜드공화국군([[IRA]]) 같은 조직을 지원하면서 불안정화 전략을 추진해왔다. [[팔레스타인]]은 이 '테러리스트 인터내셔널'에서 주요 세력으로 부상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나토]]의 불안정화를 막기 위해 미국은 소련의 지원을 받는 테러 조직들을 분쇄하려고 했다. 이스라엘도 나름대로 팔레스타인의 비밀 작전 능력을 파괴하고 싶어했다. [[미국 중앙 정보국|CIA]]와 이스라엘의 정보 기관 [[모사드]]는 이후 20년 동안 테러리스트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긴밀히 협력했다. 이러한 노력은 소련이 서구에 대해 유화 정책을 펼치게 되는 1980년대 중반까지도 약화되지 않았다. 이 기간 동안 CIA와 [[모사드]]는 또한 소련과 [[PLO]]의 공작으로부터 아라비아 반도를 지키기 위해 협력했다. 1990년대 소련의 붕괴는 이런 역학 관계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터키는 더 이상 소련, 러시아의 위험에 처해 있지 않다. 이집트는 힘없이 쇠퇴하는 국가로 전락해서 더 이상 이스라엘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 이 상황은 [[하마스]]에게도 꽤나 불리했다. 1987년에 창설된 하마스는 이집트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의 정권을 위협하던 [[무슬림 형제단]]에서 파생된 단체였다. 시리아는 고립된 채 [[레바논]]에만 집중했다. 여러 측면에서 [[요르단]]은 이제 이스라엘의 보호국이라 할 수 있다. PLO를 구성하고, 유럽에서의 테러리스트 활동을 지원해왔던 세속적인 사회주의 팔레스타인 운동의 위협은 크게 감소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원조가 꾸준히 지속되는 동안 이스라엘의 경제는 팽창했다. 이스라엘로 유입되기 시작했던 막대한 미국의 원조는 1974년 당시 이스라엘 GDP(국내 총생산)의 21퍼센트에 이르렀다. 미 의회 조사국에 따르면 오늘날은 약 1.4 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